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윈도아 행복비타민/행복비타민

관념화 하지 말라 - 병사가 성문을 지키듯~!

관념화 하지 말라 - 병사가 성문을 지키듯~!

 


 

 


대상을 관념화한다는 것은 이미 들어온 정보를 근거로 추상적으로 생각해내서 개념화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경행을 할 때, 한참을 걷다보면 왼발 후에는 오른발이 나온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에 굳이 입으로 “왼발",“오른발”을 외우지 않더라도 마음이 먼저 오른발이 올 것에 앞서고 있음을 보게 된다. 같은 일이 되풀이 되다보니 미리 예견하여 대처하는 것이다.

이것이 관념화한 것이다. 호흡에서도 마찬가지다. 들이쉬고 나면 내쉰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에 마음이 먼저 내쉴 준비를 하고 있는 경우가 그것이다. 초보자들이 종종 호흡을 알아차리려고 하면 숨이 차다고 하면서 시작도 하기 전에 포기하는 수가 있는데 이는 호흡에 힘이 들어갔기 때문이다. 호흡에 앞서“관념”이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몸의 움직임을 알아차릴 때 움직임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그대로를 알아차리는 것이 실제를 아는 것인데, 생각으로 알아차리면 실제를 아는 것이 아니라서 관념을 붙잡고 있는 것이 된다고 선생님은 말한다.

이럴 때 선생님은 호흡 알아차리는 것을 잠시 접어두고 앉은 자세나 바닥에 닿는 느낌을 보며 “앉음(sitting)”,“닿음(touching)“을 하라고 충고한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느낌“과 ”생각“에서도 있는 그대로를 느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대로 관념화하여 받아들이고 있다. 선입견(先入見)이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무엇을 한번 잘못 먹고 체한 경우에 그것을 또 먹으면 쉽게 다시 체하는 수가 있다. 조건반사 체질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사람이나 물건에 대한 선호도 이 같은 선입견을 근거로 하고 있다. 몸에서와 마찬가지로 생각이나 느낌에서도 심한 알레르기 체질이 되어있는 것이다.

이미 오래 전부터 들어와 있던 정보와 되풀이되어온 습관을 통하여 우리의 마음속에는 이렇게 관념화한 원리 원칙들이 철통같이 자리 잡고 있어서 진리를 보는데 방해가 되고 있다. 금강경(金剛經)에서는 이를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 등으로 세분하고 있는데, 이 가운데는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오랜 인류 역사와 더불어 축적되어온 사회적인 고정관념들까지 합세하고 있다.


이러한 고정관념들은 현실의 흐름을 제대로 보지 못하게 막는 역할을 한다. 이런 것들 때문에 우리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왜곡되어서, 혹은 색안경을 끼고 본다. 그래서 수행자는 들어온 현상을 “좋다, 나쁘다” 혹은 “된다, 안 된다” 판단하지 말고 그대로 인정하고 지켜보라고 한다. 고정 관념의 틀을 깨고 “있는 그대로”를 볼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바로 알아차림(awareness)이다.


들어오는 현상을 관념화하지 않기 위해서는 철저하게 실제 하는 것을 바탕으로 알아차려야 한다. 사전 지식이나 분석 혹은 상념에 의한 것은 그냥 지식일 뿐이다. 비록 그것이 부처님의 지혜라 할지라도 들은 풍월을 되뇌는 것은 자기의 것이 아니다. 수행자라면 마땅히 이점을 명심하여야 한다.


그래서 선생님은 이렇게 말한다.

" 나는 어떻다는 생각, 너는 어떻다는 생각, 무엇은 어떻다는 생각, 무엇은 어떻게 되어야 한다는 생각, 이것은 이래서 좋고, 저것은 저래서 좋지 않다는 생각, 이런 모든 것들은 관념의 범주에 있는 것이며 비생산적인 것들이다. 오직 몸에서 일어나는 실제 하는 것들, 마음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상의 실제 하는 것들만이 관념이 아닌 것이다.


관념은 모양, 명칭이며 실재하는 것은 고유한 성품을 가진 그리고 실제로 있는 것을 말한다. 몸의 실제는 지, 수, 화, 풍이며 마음의 실제는 현재 있는 마음을 아는 것이다."

 

 

 



< 병사가 성문을 지키듯 >


위빠싸나 수행을 할 때에 “병사가 성문을 지켜보듯”하라는 말이 나온다.


병사가 하여야 할 일은 성문을 드나드는 모든 사람을 면밀하게 그러면서도 사심(私心)없이 점검하는 것이다. 아름다운 사람이 지나간다고 하여 한눈을 팔아서도 안 되고 평소에 못 마땅해 하던 놈이 왔다고 보내주지 않고 시비를 걸어서도 안 된다. 한 사람도 빠짐없이 점검하되 좋고 싫음의 감정을 개입시키지 않고 그대로 통과시켜야 한다. 그래야 얼마나 많은 사람이 들어왔는지 어떤 사람이 들어왔는지 등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다.

그것이 문지기의 의무다. 위빠싸나는 이와 같이 문지기의 자세로 들어오는 현상들을 지켜보라고 한다.


그러나 간단할 것 같은 문지기의 의무가 결코 수월한 것이 아니다. 아니 한눈을 팔고 딴 생각하노라고 문지기 노릇을 거의 못하고 있다. 너무 많은 것들이 드나들어서 미처 눈치 채지도 못할 뿐 아니라 어쩌다 눈에 띄더라도 집착과 욕망으로 색칠된 차별심 때문에 문지기로서의 본분을 떠나 못 들어오게 하거나 따라가기가 일수다.


그래서 부처님은 중구난방으로 드나드는 출입자를 몸, 느낌, 마음, 법이라는 네 가지 특성에 따라 구분하여 놓고 그 중에도 특히 호흡을 통하는 문을 설정하여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는 이 문을 통과하는 것을 집중적으로 지켜보도록 하셨다.


그러니까 호흡하는 과정에서가 아니더라도 들어오는 것은 무엇이든 지켜보아야 하지만 특히 호흡을 강조한 이유는, 호흡은 항상 있는 것이고 이 곳을 지켜보는 것이 가장 능률적이기 때문이다. 통증이라든가 맛이라든가 현재 이 시점에서 가장 강하게 어필하는 것이 있을 때에는 그것을 집중적으로 알아차려야 한다.


그러나 그 강렬함이 사라지고 평상으로 되돌아 갈 때에는 다시 호흡을 알아차리는 것이 알아차림을 놓치지 않고 지속시키는 효과가 있다. 그래야 직무태만을 하지 않는다. 이 점이 선생님께서 강조하는 부분이다.

"우리의 문은 여섯 개가 있다. 눈, 귀, 코, 입, 신체, 의식의 문이다. 이 문으로 물질, 소리, 냄새, 맛, 접촉, 생각이란 대상을 맞는다. 그리고 모두 각기 인식한다. 이때 여섯 가지 문에서 대상과 접촉할 때마다 알아차림이 있으면 문지기가 지키고 있는 것이다. 알아차림이 없으면 탐, 진, 치라는 불선업의 도둑이 들어와 선업의 나 대신 주인노릇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알아차림이란 것은 문지기의 역할과 같은 것이다.

자신이 선업을 가진 자기인가, 불선업을 가진 자기인가, 또는 주인인가, 도둑인가의 여부는 알아차림으로 문을 지키느냐 아니면 지키지 못하느냐 하는 것에서 결정된다."